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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싣고서 떠나는 항해, 팬스타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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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싣고서 떠나는 항해, 팬스타 크루즈
19시간, 배에서 찾아낸 이야기


아마 한 시간 즈음 잠들었던 것 같다. 
거친 파도에 뱃멀미가 오는 듯해서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누었다가 일어나 보니 어느새 머리도 개운해져 있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창문 커튼을 열어젖힌 건 잠잠해진 바다와 그 위를 통통거리며 지나가는 배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 그대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 커다란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문득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 이 배의 어딘가에 있을 '이야기'를 찾아 나서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시키지 않더라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사명감(?)마저 생긴 채로.
분명.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 거다. 배로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특별하니까.




그러니까 몇 시간이라고? 19시간?

팬스타를 타고 간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건넷을 때 꽤 긴 여행이 될 것이란 말을 들었다.
이미 오래전 자신도 경험했다는 그 이야기 속의 배는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무려 19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배 안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만큼 느릿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달리 생각외로 배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은 편이었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거나 면세점에서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문득 밤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구성진 '부산갈매기'가 바다에 울러퍼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바다를 날아 다니는 갈매기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그런 노래가 아니던가.

"부산가아아아알매기~ 부산 가아아아알매기~♪"




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TV속에서 보던 작은 배의 모습을 생각했다. 
사람들이 배 곳곳에 앉아서 누워 자거나 가벼운 화투를 친다거나 하는.

물론 팬스타에도 그렇게 여러명이 이용하는 단체방이 있는가하면 고급 호텔을 연상케하는 방도 있었다.
내가 이용한 곳도 2인실이었으니 보따리 장수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불편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도 침대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선 몸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길이 145m 너비 22m. 숫자로 들어서는 전혀 짐작이 안가는 크기의 배다 보니 그만큼 다양한 객실을 갖추었다.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넓고, 기다란 배니까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19시간의 긴 시간을 지루하단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든 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공연무대에서 만난 필리핀출신 가수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 즈음 지났을 때, 저녁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공연은 앞서 말한 편의시설과 별개로 긴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오락거리로
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남녀노소가 즐길만한 트롯풍의?)를 즐길 줄 안다면 재미있을 공연이다.




조용필을 20% 닮은 가수, 빵빵하게 불어 오른 볼에 눈길이 가던 색소폰 연주자, 
그리고 바지에 감긴 체인이 인상적이던 마술사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보기 좋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히 박수치며 호응을 이끌어내던 사회자는 정말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프로의 자세란 그런 게 아닌가. 





이 공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메리크리스'라는 산타할아버지가 연상되는 이름의 필리핀 가수였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 갖은 재주를 가진 이들이 나오는 모 예능방송이 순간 떠오르기도 했던 그녀의 정체는
공연 전 저녁식사시간에 우리에게 와인을 따라주던 배의 직원이었다.
필리핀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 실력을 보게 될 줄이야.
이렇게 다시 만난 그녀는 무대 위에서 너무나도 빛났다.




"메리크리스요? 노래 잘 부르죠."

우연히 만난 다른 필리핀 직원에게 어설픈 영어를 동원해서 그녀에 대해 물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
메리크리스로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그녀들이 이 배에서 하는 일들을 물어보는 것까지 이어졌다.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일을 하기에 긴 시간을 배에서 보내는 동안 몇 번이고 마주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굿모닝이라고 웃으며 인사를 주고 받게 된 것은  배가 주는 공간과 시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카페에서 만난 일본인 할아버지


오후에 부산에서 출발한 팬스타는 다음날 오전에 오사카에 도착한다.
이말은 일몰, 일출 그리고 야경을 배 안에서 다 볼 수 있으므로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바다의 여러가지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쉽게 일몰을 놓친 나는 배가 곧 관문대교를 지난다는 방송에 맞추어 갑판에 올라섰다.
팬스타 크루즈가 오사카로 향하는 동안 만나는 다리는 3개로 가장 처음 만나는 다리가 이 관문대교(関門橋)다.




혼슈에 위치한 야마구치 현과 큐슈의 후쿠오카 현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다리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다리가 있는 관문해협에는 해저터널이 뚫려있어 차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림을 그려보면 다리를 오고 가는 차 아래에 배가 지나가고 그 아래로 또 차가 지나가게 되는 것!
아마 이 배 아래에는 차가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야경과 다리 구경을 하고 나서야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는 걸 느꼈다. 어쩐지 춥더라니.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녹이고자 팬스타 내에 위치한 카페 유메夢로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는 곳을 찾아 자리에 앉으니 진작 여기서 밖을 바라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 친구들한테 맥주 한 잔씩.."

자리에 앉아서 밖에서 찍은 야경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는데 옆에 홀로 앉은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영어로도 대화가 안 되는 일본인 할아버지는 그렇게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우리 일행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곤 직원을 불러 이들에게도 술을 한 잔씩 주라는 친절과 우리의 괜찮다는 사양의 말이 직원을 통해 오갔다.

결국, 할아버지는 극구 사양한 우리에게 팝콘을 사면서 이야기는 결론이 났고 자신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줬다.
아직도 생각해보면 말도 잘 안 통하는 우리에게 왜 그렇게 술을 사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왠지 모를 깊은 외로움을 느낀 듯도 하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배와 그런 외로움은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담뱃불이 타들어 가면서 내는 연기에서 보였던 것이 고독이 아니었길 내 착각이었길 빌어본다.
행복하세요, 할아버지.



갑판에서 만난 조깅 아저씨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참 신기한 일은 여행을 할 땐 몇 시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난 이유는 한 가지, 배에서 일출을 바라보고 싶단 것 때문이었다. 
수평선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 그것 하나로 전날 일출시각도 확인하고 알람도 맞추어 두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위치상의 문제(?)로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는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서 바라보는 일몰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무언가 새벽부터 일어나 바랬던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출이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대교인 세토대교가 지나가는 순간도 눈으로 봤으니까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묶으면 좀 괜찮지 않겠어?"

그렇게 갑판 위에서 일출을 찍으려고 덜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아직 초가을이니까 그렇게 춥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 바람이 어찌나 거세던지.
어떻게든 버텨보려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방에 들어가서 담요를 가지고 왔었다.
그걸 뒤집어 쓰고선 카메라를 들고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담요가 자꾸 바람에 팔랑팔랑팔랑~

혼자서 낑낑거리면서 담요가 날라가지 않게 잡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바쁜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아까부터 갑판에서 조깅을 하던 아저씨가 오더니 담요를 묶기 시작했다. 엥?
뜻밖의 친절이 감사하면서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워 고맙다는 말만 연신 할 수 밖에 상황.
아저씨는 그렇게 담요에 나를 꽁꽁 싸놓고서 다시 조깅을 하러 떠났다.
덕분에 이런 일출 사진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아저씨.... 발까지 묶어 버리시면.......전 어떻게 움직이나요..?




브릿지 투어로 조타실에서 마지막 다리인 아카시해협대교이 지나가는 순간을 바라봤다.
아카시해협대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다리가 케이블에 매달려 있는 형태)로 웬만한 지진과 강풍에도 버틸 수 있는 다리다.
앞선 두 다리와 비교해서 얼마나 긴지 감은 잡히지 않으니 나름 '세계에서'가 붙으니까 확실히 길긴 긴 롱다리다.

이렇게 3곳의 다리를 지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오사카 항에 배가 도착한다.



지나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본다. 작은 고깃배의 선장 아저씨가 같이 흔들어주는 그 순간.
배 안과 밖에서 만나는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배에서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그렇지만 그 시간만큼 많은 것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에는 못해보는 사소한 것들을 할 시간도 생기고 용기를 내어 무언가를 해보기도 한다.
지루하다고? 사실 여행이란 건 빠르게만 흐를 필요가 없지 않던가. 
조금은 느릿하게 이야기를 실을 여유도 필요한 것이 배로 하는 여행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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