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린 날 나는 베이킹소다로 눈 밟는 소리를 만들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버린 터라 그런 추억이 있었다는 건 검색을 해도 잘 나오질 않지만,
옛날, 그러니까 소리를 '손'으로 만들어내던 그 시절에 눈 밟는 그 소리는 분명 베이킹소다의 힘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런데 이 먼 캐나다까지 와서 그 어린 시절 기억이 난다니 참 재미난 일이다.
엄마가 숨겨놓은 베이킹소다 봉투를 부엌 찬장에서 기어이 끄집어내서는 손으로 꾹꾹 눌러내며 만들었던
'뽀드득'하고 나던 소리의 기억 말이다.
하얀가루 풀풀 날리며 좋아하다 결국엔 엄마의 질펀한 잔소리로 끝났던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한 스노우슈잉.
참 신기한 일이지. 이 뽀드득 소리가 그렇게도 즐겁다니 말이다.
- 스노우 슈잉..? 눈 신발? 눈 신발이라는건가?
사실 스노우슈잉이란 말만 들었을 땐 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가이드를 만나고 함께 할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안전과 관련된 서류에 사인하고,
챙겨주는 '눈 신'을 들고서 사람들을 따라 곤돌라를 타고. 눈 쌓인 산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도 뭘 하러 가는 것인지 설마 이걸 신고 등산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곤돌라에서 내렸다.
스키 타는 사람, 보드 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리조트 건물이 있던 곳.
의외로 높지 않은 지대에 만족하며 여기서 걷는 것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흡족해하는데..
더 올라간단다. 여기서 더? 어딜? 어디까지? 게다가 이번엔 곤돌라가 아닌 스키 리프트다.
쌩쌩 불어오는 바람, 새하얗게 둘러싸인 백색의 공간,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 아이고야.
출발할 때 받았던 스노우슈Snowshoe. 한국에서는 설피(雪皮)라고 불리기도 한다.
분명 설피는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이건 그것과는 달리 알루미늄 재질로 만들어졌다.
위쪽은 발을 묶을 수 있는 끈이, 밑판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뾰족뾰족하게 생긴 것이 박혀있고
길이는 눈대중으로 1m까지는 아니고 한 80cm 정도?
신는 방법도 매우 간단해, 발을 끼워 넣고 발 뒤쪽과 발 등에 있는 끈을 풀리지 않게 잡아당겨 주면 끝.
무게는 무겁지 않지만, 발 크기보다 길이가 제법 길어서 처음 걸을 땐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조금 불편했다.
스키, 스노우보드와 같은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발 밑의 뾰족한 부분이 눈에 잘 들어가게 걸으면 된다.
그래서 별다른 설명 없이 곧장 출발!
눈, 눈, 눈, 눈, 눈.. 나무, 나무, 나무, 나무.. 그리고 산.
곤돌라와 리프트를 갈아타며 20분은 더 걸려 찾아온 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산꼭대기였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리프트를 타기 전의 그 스키장까지 가는 것이 오늘의 코스라는데
평소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내 체력으로 가능할지 걱정부터 되었다.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나의 탄식.
- 아이고야.
다행히도 출발할 때 내뱉던 탄식과는 달리 이게 묘하게 재미있다.
눈이 쌓인 산을 걷는다니. 걸을 때마다 뽀드득 사각사각 나는 이 소리라니.
미끄러질까 무서워 조심조심 걸으니 평소 걷는 속도보다 더 느릿해지고 당연히 도착지점은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짜증이 나고 힘들기보다는 신기한 경험이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니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팔을 좌우로 흔들어대며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에 신이 나 걸어본다.
중간중간 나오는 높은 언덕에서는 걷는 게 아니라 엉덩방아 슬라이딩!
겁도 살짝 나지만 그래도 샥샥 미끄러져 내려가니 어린 시절 추억이 절로 떠오른다.
아쉬운 건 방수가 되는 바지를 입었던 것이 아닌지라 엉덩이가 어느새 축축..
슬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곳은 걷는 도중 계속 나오지만, 이미 축축해진 엉덩이로는 더 이상 무리였다.
'즐겁다' 보다는 '아이고 내 옷'이 먼저 걱정되는 어른이가 되어버렸나 보다.
이렇게 즐기며 신 나게 가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발이 푹 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얗게 쌓인 눈은 지형을 전혀 읽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인데 나무 사이로 푹 꺼진 지역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이기엔 작아 보이는 나무도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처럼 보일 수도 있기에 조심조심!
물론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숙련된 가이드의 뒤를 따라서 걸으면 큰일 날 일도 전혀 없고 힘들때(?)는 도움을 받기도 한다.
잉글랜드에서 온 이 키 큰 친구는 슬라이딩하고 내려와서는 제힘으로 일어나지 못해
몇 번이고 가이드와 다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다. 그것도 재밌다고 하하 웃어대더라는.
- 여기는 여름이 되면 다양한 야생초가 피어나서 정말 예뻐요.
선샤인 메도우Sunshine Meadows라는 지역에 도착하자 분명히 스노우슈잉 가이드는 그렇게 말했다.
야생초? 이 하얀 눈밭에 야생초가 핀다고?
표지판에도 여러 가지 꽃 그림이 그려 있긴 하지만,
이 눈이 녹는다는 것도 꽃이 피어나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는 호수 위, 여긴 꽃밭 위. 하얀 눈은 지금 내 위치가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게 뽀얗게 칠해놨다.
그래도 이 뽀얀 눈이 감추지 못한 것들,
언제 지나간 것인지 모를 토끼의 발자국과 하얀 눈을 뽀송뽀송하게 만들어주는 나무의 꽃눈.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작은 것 하나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사람의 손이 쉽사리 닿지 않는 곳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동물 발자국을 발견할 때 마다 눈 사이 어딘가에 숨어 날 지켜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봤지만,
한 마리의 동물도 만나지 못한 건 좀 아쉽다.
스노우슈잉을 지나고 한 시간이 좀 지났을까 가이드가 쉬어가자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저 가방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주섬주섬 보온병과 반찬 통 하나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내민다.
-메이플 쿠키와 핫초코예요.
이름만큼이나 참 달콤한 간식의 등장.
캐나다 기념품으로 꼭 사 가지고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메이플 쿠키의 예고 없는 등장은 어찌나 반갑던지.
따끈한 핫초코와 함께 먹는 메이플 쿠키의 달달함은 배가 되어 긴장되었던 언 몸을 달달~하게 풀어준다.
돌아가는 길에 꼭 사가리라.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눈 쌓인 산을 걷기 시작한다.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릴 적 베이킹소다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체력이 그렇게 좋지도 않은 내가 느릿한 산책을 즐기지도 않는 내가 이 스노우슈잉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아마 '소리'의 힘이 세지 않았나 싶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뽀드득 소리가 정겨워서.
그렇게 걷다 보니 끝이 없어 보이던 스노우슈잉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즐기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제 남은 길은 내리막이다.
스노우슈잉 가이드는 한번 더 미끄러지지 않게 걷는 법을 설명해 준다. 역시나 어렵지 않은 방법.
- 오오! 드디어 도착!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왔는데 '드디어'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건 분명 머리가 아니라 몸이 뱉어낸 말이다.
곤돌라와 리프트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간까지 합쳐서 한 두 시간 남짓 되는 시간이었는데
눈보라가 몰아치거나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에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던 등산인들을 떠올리며 걱정한 것과는 달리
나의 체력으로도 무난하게 잘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눈보라도 영하 날씨도 없었고.
'드디어'는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니까.
- 눈을 밟으면 어떤 소리가 날까?
- 아삭아삭
스노우슈잉의 글의 첫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 절친 우쿠에게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유를 물으니 냉장고에서 갓 꺼내어 뽀얗게 깎은 배를 씹을 때 나는 소리만큼이나 달콤해서란다.
- 이 풍경을 글로 적을 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 백설기
함께 스노우슈잉을 즐긴 가이드분에게 물었다.
공기 중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이 갓 쪄낸 모락모락 피어나는 백설기의 연기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푹신푹신하게 느껴지는 눈의 느낌도.
그러게.
눈은 뽀드득 베이킹소다요,
눈은 사각사각 맛있는 배요,
눈은 모락모락 백설기 떡이다.
그리고 이 모든 느낌을 느끼게 해 준 게 스노우슈잉,
글을 써 내려가며 느꼈던 그 즐거운 시간을 기억으로 남기며 아쉬움을 내려놓고 눈 신을 벗는다.
스노우슈잉(Snowshoeing) 관련 정보
http://www.whitemountainadventures.com/group/winter/snowshoeing-sunshine-meadows
1. 11월 중순부터 5월까지 가능하다.
2. 스노우슈잉 시간은 2시간에서 2시간 반이 걸린다.
3. 12세 미만의 어린이들은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4. 선글라스와 스키복, 방수가 되는 신발, 장갑은 꼭 챙기길.
소소한 1% 이야기 : 글엔 없지만, 스노우슈잉 도중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몇몇 사진은 아이폰으로 찍었다. 아..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