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는 기분으로 보는 사진을 보다
박노해 사진전 '다른 길'
사진전을 가면 '본다'와'느낀다'에 충실하는 편이다.
하나하나의 사진에 담긴 모습을 읽어내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사진전의 매력이자 감상방법이 아닐까 하는데,
오늘 전시는 여기에 '읽는다'를 추가해서 넣어야 할 것만 같았다.
사진을 읽는다.
전시를 끝까지 보고 난 후,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고 조용히 덮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사진을 찍은 이가 시인 박노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사진 옆에 달린 글귀가 정보가 아닌 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진에는 이야기가 쓰여있었고 그걸 읽어내려 가며 나는 감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느 전시들 중에서도 나는 사진 전시회를 좋아한다.
오늘 또한 팜플렛에 실린 사진 하나에 마음이 동해 구경가려했는데 페이스북 이벤트에 당첨되어 티켓을 얻었다.
그렇지만 다른 유명 전시들과 비교해도 입장료가 저렴해(일반 5,000원) 부담없이 볼 수 있고
전시의 질과 동선이 매우 좋아 입장료가 싼 게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었다.
|지도에도 없는 마을 속으로 여행을 떠나다.
전시는 박노해 시인이 티베트, 라오스, 파키스탄, 버마, 인도네시아, 인디아 등에서 기록해온 사진 중 엄선했다.
인간에게 위대한 일 세 가지. 사는 것, 사랑하는 것, 죽는 것.. 이 위대한 '일상의 경이'를 담아냈다는 전시기획을 읽으며
화려하지도 멋드러지지도 않으며 조용히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을 조용히 드러다볼 수 있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봐도 좋을 사진
주말 전시는 어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에 조용한 감상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 같다.
이번 전시 역시 많은 사람이 찾았는데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이 다른 사진 전시와는 달랐다.
사진의 피사체의 연령이 다양한 만큼 전시를 찾은 이들도 어린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분들까지
모두가 같은 느낌을 받을 순 없겠지만, 박노해 시인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는 분명 전해졌으리라 짐작해 본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 시인 박노해
그러고보면 그의 이름을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이 '노동해방'에서 따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벽면에 적힌 짧은 그의 소개를 읽는 순간, 유난히 문장 하나가 눈에 밟혔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수가 되어 징역을 살다가 특별사면되어 석방된 그가 남긴 이 말은 그의 신념을 느끼게 해 준 말이었다.
그런 그가 '지구시대 유랑자'로 15년간 전세계를 다니며 남긴 이야기와 사진은 분명 무언가가 있으리라..
▲ 그가 가진 두가지의 무기, 낡은 만년필과 필름 카메라 하나
낡은 만년필 한 자루와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남긴 이야기는 지금의 시대와는 다른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오고
조금은 느릿하게 물끄러미 작품 하나하나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그러한 연유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Ulee Lheue village, Sumatra, Indonesia, 2013
절망의 바닥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은 희망이 아니지 않느냐고.
파도는 끝이 없을지라도 나는 날마다 나무를 심어갈 것이라고.
Ulee Lheue village, Sumatra, Indonesia, 2013
|피사체로부터 한 발 물러서다
흔히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피사체에 한 발 더 다가서라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그는 멀찌감치 물러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모습을 지켜본다.
치열하게 사진을 찍는 것보다도 담담하게 지켜보는 법을 택한 것이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이렇게 꾸역꾸역
불굴의 걸음으로 밀어가야 한다는듯이,
쟁기를 잡은 농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Amuquhu village, Shankar, Amdo Tibet, 2012
|피사체에 한 발 더 다가서는 나만의 감상 방법
이번 전시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을 마음껏 찍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의 전시가 저작권이나 초상권의 이유로 내부 사진을 금해왔기 때문에 마음껏 사진을 담을 수 있단 건
나만의 감상법으로 작품을 봐도 괜찮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이 룰을 반겼기에 작품을 감상하는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져 인내심을 가져야만 했다.
어깨는 무거워도 사랑이 가득 담긴
아내와 아이의 배웅을 등에 받으며
맨발로 내딛는 가장의 걸음에는
할 일을 다한 자의 당당함이 실려 있다.
Ngadisari village, Probolinggo, East Java, Indonesia, 2013
전시를 감상하는 방법은 나름대로겠지만, 이번 전시는 박노해 시인이 서술한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는 배웅하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그 뒤론 보이지 않지만 따뜻한 시선이 닿일 등을, 그 후엔 그의 당당한 맨발을.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 그와는 다른 각도로 과감하게 담아 보며 전시를 구경해 나갔다.
집에서는 가족과 아이들이 기다리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붉은 석양이 무거워
여인은 능선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오랜 동료이자 식구인 말은 손님을 태우지 못한
자신의 등이 미안해서인지 고객 숙여 주인을 위로한다.
Jiu qu huang he di yi wan, Ruoergai, Amdo Tibet, 2012
글의 흐름을 따라 사진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다 보면 나도 박노해 시인이 바라본 그 상황 속에 같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고
사진 하나 힐끔 보고 지나치는 것보다 더 많음 감정을 받게 되고 만다.
|자신의 이름과 목소리를 빌려준 이들..
전시의 한 편에는 목소리를 통해 재능기부한 스타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각자 박노해 시인과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하는 이들은 가수부터 배우, 방송인까지 매우 다양했는데
그들의 목소리로 박노해 시인의 글을 들을 수 있단 것은 귀가 즐거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배우 '배수빈'으로 '희망은 패배보다 강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를 읊는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면서도 강한 흡입력이 있어 정말 듣기 편안했다.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러고 보면 전시 타이틀이 가진 '다른 길'이란 의미는 꽤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6개국의 사람들이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믿고 묵묵히 걸어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박노해 시인이 자신의 마음 속의 길을 찾아나선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 때문.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전시가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은,
진정한 나를 찾아 나아가다 보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란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는지.
평범하지 않은 박노해 시인이 담아낸 가장 평범한 곳의 이야기.
문득 세상에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란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 이들..
분명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거다.
전시를 통해 그런 그들 모습을 조금이나마 바라보며 내가 걸어나갈 길은 어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찬찬히 읽은 후, 그렇게 전시장을 나섰다.
그 동안 많은 전시를 봤지만, 도록을 산 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절로 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을 그대로 책에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혹시나 전시를 놓친 분들이라면
모든 전시 사진과 내용이 한 권으로 담겨져 있으니 적극 추천한다.
한 권의 소설과도 같았던 전시이야기를 끝난 후에 풀어내게 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27일간의 전시가 끝나고 내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언제 신청했는지 기억은 정확히 나질 않지만,
주최측에서 감사의 인사를 담아 보내 온 문자마저도 하나의 고마움이었다.
박노해 사진전 '다른 길'
홈페이지 : http://anotherway.kr/
페이스북 : http://www.facebook.com/anotherway2014
1% 소소한 이야기 : 사진전을 놓쳐서 아쉽다면, <라카페갤러리>란 곳에서 시인의 첫 사진전인 <라 광야>전이 하고 있고,
3월 7일 부터는 에티오피아 사진전 <꽃피는 걸음>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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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직접적인 권한은 박노해 시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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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 : Panasonic GF-1, GX-1 (신난제이유) / Olympus OM-D(우쿠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