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서적이 아닌 서적들은 될 수 있으면 리뷰 신청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음에도, 욕심나는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들 중의하나다. 월간 페이퍼의 발행인인 김원이 쓰고 찍은 이 책은 제목부터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좋은 건 사라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책도 분명히 사라지지 않을 테지.
책은 전체적으로 짤막한 79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고, 타이틀은 저자인 김원이 쓴 캘리그라피로 쓰여 있다. 캘리그라피로 유명한 강병인 씨나 별 삼킨 밤, 백종열 씨, 공병각 씨와는 달리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그만의 글씨체는 소소한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평범하면서도 빛나는 매력을 더욱 잘 살려 내고 있더, 특히, 책 뒤편의 가격부분과 ISBN마저도 손 글씨로 표현한 디자인 센스 또한 마음에 든다.
이 책의 내용들은 소소하게 한 번쯤은 생각해봤음 직한 이야기들을 너무나도 편안하고 쉽게 풀어나가고 있다. 자못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도 저자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서 막힘이 없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인도의 고대 유물 두 점을 손에 넣은 이야기(p.74)와 함께 책에 실린 그 5만 원 짜리, 3천 원 짜리 불상 사진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제대로 쓰인 글이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글, 혹은 무언가 깊은 고뇌에 빠질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너무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 속에는 나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할 만큼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에 대한 행복을, 가끔은 손 편지가 주는 따뜻한 여유를, 밤하늘, 바람, 햇살을 느끼는 순간들이 책 가득 빼곡히 담겨 있어 책장 한 장 한 장을 느낄 때마다 오늘 하루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뒷장의 그림은 제가 연필을 입에 물고 그린 그림입니다. 제 얼굴을 그린 건데, 제법 잘 그렸죠? 연필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려본 건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제법 그럴싸하게 그려져서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연필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느냐구요? 그게 그러니까,얼마 전에 앨리슨 레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무언가 제 가슴에 찡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앨리슨 레퍼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부모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지요. 부모들이 비정하게 내다버린 그녀는, 아동 보호소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 팔이 없는 상태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면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더군요.
두 팔이 없다면, 어떻게 밥을 먹고 어떻게 모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한 일이더군요. 그러나 정작 앨리슨 레퍼는 발가락을 이용해 요리도 하고, 인터넷도 사용하고, 특수하게 제작된 자동차도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리고 두 팔이 없는 자신의 몸을 셀프 포트레이트로 담아내는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한 소년의 엄마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저는 두 팔이 없는 앨리슨 레퍼에 비하면, 얼마나 큰 혜택을 안은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과도 같은 혜택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하며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았고, 그 혜택을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했습니다. 앨리슨 레퍼는 그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저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두 팔과 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슨 레퍼만큼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아주 오래된 저의 나태한 자세를 꾸짖으며, 저도 그녀처럼 연필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준 그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연필을 입에 물고 그린 그림 (p254)
책의 중간쯤에는 저자인 김원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구성된 페이지가 나온다. 이름 하여 '백발두령 김원의 음악이 있는 작은 사진전'. 사진마다 같이 들으면 좋을 음악들도 소개되어 있어, 여유롭게 차 한잔하면서 읽으면 좋을 사진들이 괜스레 반갑다.
가수 김창완 씨는 이렇게 말한다. '김원의 사진엔 초점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선명히 맺히는 게 있다. 잉어가 지나간 자국 같은 김원의 서체에선 인간애가 느껴진다. 글의 내용은 다 똑같이 "여러분 사랑합니다." 이다.' 김원이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인 그가 적은 이 추천사는 이 책이 어떤 것인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다. 잘나지도 않았다. 멋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렇기에 더 공감하고, 그렇기에 더 즐겁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낭만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만, 낭만이 없었다면 오래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들, 좋은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 책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덧_글을 더 잘 쓰고 싶다. 그처럼 소소하고 편안하게. 포스팅 쓰는 내내 부족한 글실력을 탓하고 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