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와서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선데이마켓(Sunday Market)'이다.
어려서부터 엄마 따라 가는 시장의 재미에 빠져서인지 '일요일'과 '시장'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가
나에게는 어찌나 설레게 다가오는지. 물론 남들은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호주, 퀸즐랜드주, 카불쳐. 정말 '딸기농장' 외에는 볼 것 없는 한적한 마을, 오로지 딸기 팩킹에만 전념했던 그때..
브리즈번에서 출퇴근하던 내게 그나마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카불쳐 선데이마켓이다.
딸기 시즌이 끝나고 곧 멜버른으로 이동을 앞둔 어느 일요일, 나는 마음을 먹고 그곳으로 향했다.
보통의 선데이마켓은 아침 일찍 시작해 점심때쯤에 끝난다. 그렇기에 부지런히 일어나 움직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날은 전날 시장 근처의 팜스테이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서 놀았던지라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너무나도 여유롭게 시장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릴 수 있었다.
새벽의 기운이 아침 햇살과 함께 옅어질 무렵 사람들이 팔고자 하는 물건들을 들고서 하나 둘 나타났다.
늦잠자기 바쁜 일요일 아침임에도 오늘을 위해 새벽 일찍부터 집을 나선 이들이 선데이마켓을 만드는 주인공들.
이윽고 닫힌 철조망 문이 열리고 기대감을 잔뜩 갖고서 시장에 들어섰다.
어떤 재미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을지, 신선한 과일을 한 아름 사 들고 갈지 머릿속은 벌써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
참! 모든 시장이 그렇듯 입장료는 따로 없다.
문이 열리자마자 아직 개시하지 않고 준비 중인 곳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런 곳은 한 바퀴 싹 돌고 다시 찾아와서 보는 걸로 하고 걷는 걸음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여유롭게 둘러본다.
지역의 특색이라고 해야 할지 브리즈번 시티 중심에서 열리는 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반짝반짝 새것보다는 손때가 많이 탄 연륜 있는 물건들이 많이 보인다.
그 속에는 이런 것도? 싶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이런 것까지! 싶은 물건까지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곳인가!
물건에 흐르는 느릿한 시간만큼 판매하는 사람들도 느릿한 마음으로 손님을 바라볼 뿐 어떤 호객행위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물건에 가져다주는 관심만으로도 따뜻한 눈빛으로 인사하는 이들이 참 좋다.
관심 있게 봤지만, 마음에 드는 상품을 끄끝내 발견하지 못한 구제 옷들.
이런 곳에서 괜찮은 구제 옷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왔던지라 잔뜩 기대하고 살펴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패셔니스타'에게만 해당하나 보다. 원피스 자락을 들었나 놓았다만 하다가 결국 돌아섰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모든 시장의 공통점이 아닐까.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과일들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바로 몇 개의 과일들을 골라 담았다.
이렇게 담은 과일들을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다 보면 그 앞에 선 판매자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도 한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걸요.
어렸을 적 기억의 집 앞에서 벌어지던 오일장이 생각나는 풍경도 만난다.
늘 키우다가 죽이기 일수였던(!) 금붕어와 한 번쯤은 키워보고 싶었던 기니피그가 있는 게 아닌가.
어릴 적 오일장에서는 토끼와 강아지를 정신 놓고 쳐다보다가 엄마에게 질질 끌려가곤 했었는데..
문득 그 때 그 시절 생각이나 피식 웃고 말았다.
남들에게는 그저 그런 물건이지만 나에겐 꽤 흥미로운 것들이 바로 골동품.
문지르면 지니가 튀어나올 것 같은 램프들과 녹이 슬어 더는 옷을 다릴 수 없을 것 같은 다리미들.
녹이 슬고 칠이 벗겨져 빳빳한 새 것 같은 맛은 없을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골동품의 매력이 아닌지.
그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이 다양한 '틴케이스'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속 내용물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무엇을 넣을 수 있을까 고민도 해 본다.
막상 관심을 두고 사볼까 했더니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아서 짚었다가 황급히 내려놓고 가던 길을 마저..^^;;
내가 가장 사고 싶었던 것들. 그러나 워홀러의 가방에 들어가기엔 너무 크다.
주방 도구 욕심은 요리를 잘하든 못하든 여자들에겐 역시 어쩔 수 없는가보다.
이 컵과 주전자 세트는 다 합쳐 40달러의 가격으로 북유럽다운 디자인이 마음에 무척 들었는데
자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그 무게가 부담스러워 사진만 찍고 말았다.
보고 또 봐도 역시 사왔어야 했나 생각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아침 햇살에 어찌나 예쁜 빛깔을 내던 뭐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물건으로
물방울 모양의 유리를 마지막으로 달아놓고 사이사이에 비즈와 다양한 모양의 부품들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한 줄보단 역시 여러 줄을 발처럼 달아야 예쁠 것 같아 포기했다.
그럼, 빈손으로만 돌아왔느냐고? 그럴 리가!
모든 종류의 카메라를 아끼는 나와 우쿠는의 발걸음을 자연스레 멈추게 한 중고 카메라들.
생각보다 적은 가짓수에 적잖이 실망은 했지만, 그 속에서도 구매한 것이 minolta-16이라고 적힌 카메라.
고장이 났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필름도 흔한 35mm가 아닌 110mm가 들어가는 카메라다. 왜 샀느냐고 묻는다면,
"예뻐서요."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007 영화에 나올법한 스파이 카메라가 오늘의 득템 하나.
(소심하게 흥정해서 10달러 깎아서 샀다. 흐뭇!)
그리고 또 사게 된 것이 맥도날드의 해피밀 세트에 들어있는 장난감들을 묶어놓은 것.
다분히 유아적인 취향이지만, 그래도 이 장난감들이 지퍼백 가득 담겨서 4달러에 판매되는데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옆에 개당으로 판매되던 피규어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
슈렉세트와 스머프세트를 사 들고 즐거운 기분이 아주 지퍼백만큼이나 빵빵해졌다.
한번은 카불처에 사는 동생들이 이 시장에서 수박을 사왔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장 참 별로네..라고 생각했었는데, 가만 보니 같은 시장이네. 참 재미난 일이다.
내가 산 과일들은 제법 괜찮았는데 말이지.
딸기농장이 아니라면 절대 가지 않을 머나먼 동네. 그래도 오로지 '딸기'만 기억하고 돌아오진 않아서 다행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카메라 수리를 맡길 때도 생각날 것이고, 슈렉과 스머프들을 책상 위에 올려둘 때도 생각날 테니까.
일요일과 시장이 빚어낸 즐거움, 좋아하는 물건을 사서 더 즐거운 그런 날이었다.
+호주 시장시리즈 1편, 브리즈번의 특별한 수요일 : http://sinnanjyou.tistory.com/92
+호주 시장시리즈 2편, 어느 여름날 동네 야시장 Coburg Night Market : http://sinnanjyou.tistory.com/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