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tranger. 안녕, 이방인.
그들을 처음 봤을 때는 분명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양 고개를 돌려버렸다.
캐나다 알버타 주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나를 가장 즐겁게 해주었던,
가장 흥분케 해주었던, 그리고 가장 숨죽이게 했던 이들이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밥 먹으러 가던 숙소 앞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던 차도 위에서
그렇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잠시 내려두었던 카메라를 찾기 위해 허둥지둥하게 한
그들과의 만남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왔니? 밴프에 온 걸 환영해!
캐나다 여행의 시작이었던 밴프,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갑자기
만났던 사슴 3마리.
그들의 예상치도 못한 등장은 여기가 알버타 주로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들었다.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이런 동물과의 만남이었기에 밴프 초입에서부터의 만남은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만 좀 쫓아와. 나도 밥 먹어야 하니까.
예상치 못한 등장에 놀란 하루가 지나가고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아쉬운 그때 또, 예상치 못한 등장이 이어졌다.
호텔에서 아침식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내 눈을 휘둥그레하게 한 사슴의 재등장.
예고해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도망가지 말고 있어주라. 응?
그런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사슴의 뒤를 쫓아 조심히 움직였다.
아침 먹이를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느릿한 발걸음으로 호텔 주변을 서성이던 사슴은
다행히 카메라에 그 고운 자태를 몇 장 찍을 기회를 주고서 유유히 사라졌다.
엄마, 쟤가
우리 찍는데요. /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다시 사슴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재스퍼 파크 롯지에서였다.
페어몬트 계열 3개 호텔(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페어몬트 레이크 루이스, 페어몬트 재스퍼 파크 롯지)를
다 보고 싶다는 마음에 계획에는 없던 곳을 짬 내어 찾아갔던 곳인데 사슴 가족의 환영(?)은 예상 밖의 행운이었다.
다행히 한참을 바라볼 시간을 준 사슴 식구들.
그들의 매력 포인트는 단연코 그 순하디 순한 눈망울이었는데
벼루에 살짝 담근듯한 꼬리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그맣게 달린 꼬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유난히 뒷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던 것도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분명.
사슴을 발견했던 곳: 밴프 입구,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호텔, 밴프 어퍼 핫 스프링스, 재스퍼 파크 롯지
가는 거야? 언제 또 올 건데?
밴프의 마지막 코스는 얼어붙은 호수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름에 보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 호수들은
초봄인 이때만 해도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아 그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엽서 속의 풍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야만 하는 길,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산양 두 마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 찍기 바쁜 찰나 엉덩이로 인사하던 한 산양은 갑자기 자세를 잡는다.
사슴과 전혀 다른 강력한 노상방뇨 세레머니(!!)에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다른 동물들이 나를 피해 움직이던 것과 달리 이들은 오히려 내 쪽으로 걸어와서
밴프를 떠나는 길을 배웅을 해주는 것 같아 괜히 고마웠다. 다음에 오면 그땐 마중 나오기다!
간다는데요? / 뭐 알아서 잘 가겠지.
재스퍼에서 에드먼튼으로 향하는 길을 배웅해 준 것도 이 산양이다.
밴프와는 상냥한 산양과는 달리 무뚝뚝한 재스퍼 산양은 작별인사를 해도 돌아봐 주지 않고
눈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무언가를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떤 산양은 엉덩이만 보여줄 뿐이었다.
냉정하기도 하여라.
산양을 발견했던 곳: 투잭 호수, 재스퍼 나가는 길 차도가
안녕! /안녕! / 왔냐? 여기가 재스퍼다.
밴프가 사슴이라면 재스퍼는 엘크(와피티사슴)다.
가녀린 몸과 순한 눈망울, 앙증맞은 꼬리의 밴프 사슴과는 달리
거친 눈빛, 억세 보이는 갈색 목 털, 여유
있는 앉은 자세의 엘크는
재스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로 개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었던 동물이기도 했다.
어험!
/ 야, 내가 조강지처야! 어? / 어머, 알았어요. 누가
뭐래요.
앞서 만났던 동물들과 달리 엘크는 정말 ‘떼’를 지어서 몰려다니는 동물이었다.
한 마리가 얼핏 보인다 싶으면 그 주변에 여러 마리가 있어 그 숫자에 순간 긴장하게 하는 동물, 그게
엘크였다.
보통 수컷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컷을 데리고 다니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재스퍼에서 엘크 무리를 발견한다면 ‘뿔’을 가지고 있는 녀석부터 찾아보길.
저게 뿔인가 아닌가 헷갈릴 정도의 작은 크기일지라도 그 무리를 이끄는 당당한 ‘수컷 엘크’다
어머 쟤 또 왔네 / 신경 쓰지 말고 밥들 먹어.
재스퍼에서 머무는 이틀 동안 내가 엘크 무리를 만난 것은 어림잡아도 다섯 번.
그만큼 재스퍼 마을을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구경 다닌 이유도 있겠지만,
동네 강아지처럼 자주 출몰했던 것도 사실. (재스퍼에 있는 동안 동네 엘크란 말을 실감했다!)
늘 무리 지어 다니기에 눈에 금방 띄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자기 할 일에(?) 집중하며 느릿하게 움직이다보니
사진을 찍는 것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수월한 편이다.
한번은 이 엘크들이 기찻길을 가로막고 쉬는 중이었는데 저 멀리서 기차가 오기 시작했다.
로드킬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익숙한 일인 양
기차는 느릿한 속도로 오며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참 대단도 한 것이 그래도 엘크는 재빠르게 뛰어서 비키거나 하지 않고
느릿하게 기차 가장자리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여러 마리의 엘크가 하나같이 느릿느릿.
잘가 /
잘가 / 잘가 / 잘가라
재스퍼를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어디서 소문이라도 듣고 온 것인지 이날은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다른 엘크 무리가 등장했다.
이틀 동안 카메라를 들고 자신들을 쫓아다니던 내게 배웅인사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이 거대 엘크 무리는 차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풀을 뜯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고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마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엘크들을 바라봤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아올 때에도 로키산맥을 뒤로 한 재스퍼 마을 한 편의 풍경이 되며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
엘크를 발견했던 곳: 기찻길 근처, 호텔 토쿠인(Toquinn) 근처
안녕, 우리도
있다는 걸 잊지 마!
사슴, 산양, 엘크에 밀려 평범한 동물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알버타 주에서 만난 개들은 기본적으로 큰 개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종이 많았다.
캐나다의 추운 겨울엔 작은 크기의 개들보단 역시 큼직한(?) 개들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눈이 내리는 아침에도 주인과 함께 길을 나선 개들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듬직해 보이던지.
그 큰 몸과는 달리 이방인인 나에게도 순한 눈망울로 인사를 해 오는 착한 그들.
용기 내어 목덜미를 살짝 쓰다듬으면 다리에 몸을 비비며 더욱 살갑게 군다.
이 여행이 즐거웠던 것은 어딜 가나 늘 반겨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공존하는 방법에 대하여..
"동물들이 길을 지나갈 수 있게 해 놓은 거지."
차도 위에 있는 짧은 길이의 터널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주는 가이드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도로가 양쪽으로 펜스가 있어서 동물들이 길을 건널 수가 없으니,
길 중간 중간에 동물이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놓은 것.
다리를 건너는 동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다리를 건너가는 사슴가족, 엘크 무리, 산양
친구를 상상해보면 참 동화 같은 장면이 아닌가.
캐나다 로키산맥을 배경으로 동물과 사람의 우정 이야기를 담은 그런 동화.
그런 동화의 이야기는 다리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가게 앞에 내려놓은 소소한 물그릇 하나에서도 배려가 느껴진다.
산책을 하던 개가 목을 축이며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길에 가지런히 놓아 둔 알버타주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며
이곳을 찾은 이방인인 나는 동물과 사람이 자연 아래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호텔 식당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엘크를 찍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엘크를 향해 한발짝 한발짝씩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나 보다.
식당에 있던 마을 주민 할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고 주의를 받을 정도로.
할아버지의 말은 그들이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가 컸지만, 동물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알버타 주에서 만나는 동물을 찍겠다고 산 줌렌즈가 무색해지는 이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과 우리의 약속을 깨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 것.
대자연과 동물, 그리고 사람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약속이 아니든가.
원래부터 그들이 사는 곳에 우리가 함께 살게 된 것이라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로키산맥에서 계속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그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갖고서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한다.
그리고 그땐, 분명 또 다시 반갑게 인사해 주겠지.
Hello, Stranger.
1% 소소한 이야기 : 그렇게 보고 싶었던 동물이었던 곰은 내가 캐나다를 간 4월에는 발견할 수 없었다.
겨울잠을 꽤 오래 자는구나. ㅠㅠ